촘촘하고 견고한 점들의 성(城), 언제까지 버틸까?
반이정 / 미술평론가
art in culture, 2003년 8월호, pp. 140-141

"유승호가 영 아티스트 맞나?" 이미 몇 달 전 (아트) 담당기자가 내게 반문한 내용이다. 영 아티스트 난에 그간 선정되어온 평균치 연령이 유승호보다 적게는 2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연상임에도 이런 질문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기대주를 소개하자는 기획취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승호가 세간에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공식적 등용시점을, 지금은 사라진 동아 갤러리의 98년 공산미술제 공모전으로 이해한다 해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일찍 발굴해낸 편에 속한다. 당시 239명 공모에서 본심에 오른 16명중에서도 그는 최연소였고, 결국 ‘2등에 해당하는’ 우수상까지 받는다. 그런데 “작품만을 심사대상으로 했던 본심 심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이는 유승호였다(정헌이-당시 심사위원)." 최종심사는 포트폴리오 심사였기에 밀렸다는 얘기. 그렇다. 포트폴리오와 원작 사이의 질적 천양지차야 어떤 작업이건 예외가 될 수 없겠지만, 그의 작품은 복사본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원작의 진가가 무언지 웅변해주는 좋은 범례이다. 내친 김에 에피소드 하나 더. 작년 어느 미술관에서는 다음해 전시를 위해 젊은 기대주의 개인전도 기획 중이었다. 물망에 오른 작가 중에 그도 있었다. 자문위원 회의 때,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한 위원이 "유승호는 너무 많이 떴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부적합자를 나는 왜 굳이 이 지면에 소개하자고 우겼을까? 몇 차례의 수상경력과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유승호가 발 딛고 있는 출발선은 어쩐지 촉망 받는 여느 신인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 한 계기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작업실로 찾아간 나를 ‘허름한 자전거’에 몸을 싣고 마중 나온 청년의 모습에서 처연함을 느낀 걸까? (그건 물론 아니다 -_-;;) 혹은 1년에 고작 작품 1~2개 팔지만 그걸로 생계가 될 수 없다는, 혹은 올 초 석남 미술상을 수상금 2백 만원은 결국 도록 찍는데 전부 써버렸다는 고백들을 통해, 새삼스레 이 바닥 사정에 십분 공감한 걸까? 이미 주목 받았던 이에 대한 변변치 못한 처우도 그를 ‘환기시킬 이유’가 된다고 봤다. 쉽게 얘기해서 스스로 자립하라고 방관하기에는 지원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What is 유승호 스타일?
'유승호 스타일'이란 게 있다. 그를 조금 아는 이라면 어렵지 않게 머리 속에 그것을 형상화할 수 있다. 그럼 자기 스타일이 없는 작가가 어디 있냐고 반문할 테지?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그 독창성이 작금의 회화 현실 위에 자리 매김 하는 의미이다. 철 지난 이론이지만 모더니즘의 독창성은 네모 격자(grid)에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격자의 명제를 무효화시킨다고(로잘린드 크라우스) 했다는데. 내친 김에 더 나가보면, 모더니즘의 기본 단위인 격자 전통을 쇠라와 시냑 같은 점묘주의자에게서 찾은 그녀의 이론에 기댈 경우, ‘점 단위로 구성된 구상 이미지를 평면에서 짜 넣는’ 측면은 그의 스타일과 유형적으로 몹시 닮아있다. 그는 모더니즘에 근접한 걸까? 그럴 경우 그의 스타일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무효화될까? 그렇지는 않다. 정설이 되어버린 모더니즘의 독창성은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언어적 불투명성 즉 서술과 대화에 침묵하는 격자를 택했지만, 알다시피 그의 작업에서 언어는 과잉되어 나타난다. 아니 언어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설사 그의 그림 속 언어가 ‘의미로서’ 보다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기여한다고 한들 그와 언어, 그와 구상성과의 유착은 가볍게 넘길 수준이 아니다. 그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구분이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작금의 회화 현실에서 볼 때, 비로소 특이한 작가다. 왜냐면 궁지에 몰린 회화의 가장 괄목할 만한 대안으로 부상한 다매체 작가군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참호를 팠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급부상한 신예인, 다매체 작가군이 회화의 매체적 한계에 대한 시인에서 출발하여 다매체에 대한 투신과 평면의 극복을 해법으로 설정했다면 유승호 스타일은 문제의 시발점이 된 사안 내부로 정면 돌파해 들어간다. 저주받은 땅 위로 씨앗을 뿌렸으니, 당연히 해법 찾기가 고될 밖에. 그럼에도 해냈다. 구상성과 텍스트는 유지하면서 창작 가능성을 개진한 것, 이것이 유승호가 해낸 점이다. 내친 김에 그의 독창성을 몇을 더 나열해보자. 동양적 매체(한지와 먹)로 서양적 스타일을 구현한 사실은 새로울 건 없지만 나름대로 잘 소화한 편이다. 배경, 색채, 명암, 이 모두가 점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완성된 구상이미지는 최소한의 분량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 효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구상 단계와 추상 단계의 가운데에서 여전히 정체성 혼란을 겪는 작가들의 일반 정서를 요령 있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 모습이 길 잃은 자가 아닌, 새 길을 개척한 자로 나타난다. 한편 단조로운 조형원리에 비해, 노동집약적 수행을 거쳐야 하는 수행 원리 역시 보는 이의 개연적인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 그림을 ‘읽으면서’ 보게 만든 점도 기묘한 관람법 유도이다. 이 모든 것을 일컬어 바로 ‘유승호 스타일’이라 한다.

다 커버린 점(들). 장차 무엇이 될꼬?
아무리 독창성을 확보했다 한들 결국 노는 바닥이 캔버스에 국한되고 노하우 역시 이미 결정된 상황일 경우, 작가는 정체에 빠질 법하다. 그래서 “유승호의 경우는 작업에 지나치게 상처받거나 지나치게 자부심을 갖는 길을 피했으면 한다(이영욱).”는 조언이 나오는 것일 게다. 평면에서 자기 색을 구현한 작가들이 나중에 신매체의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해서 그와의 인터뷰 말미에, 머지않아 봉착할 소재와 방법상의 한계에 대비할 필요가 있지 않냐고 나는 물어봤다. 물론 그는 이미 벗어나고 있는 중이긴 했다. 입체 작품이 등장한 바 있고, 전시장 벽면에 ‘설치라 할 법한’ 작업도 선보였다. 허나 이렇다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이 평면을 뚫고 연장되는 길은 또 다른 방법론과 주제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스스로도 인정했듯 그는 작품이 담을 수 있는 서술성과 의미보다는 표면 위에 얇게 발라진 끄적임의 유희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따라서 한지 위에 로트링 펜으로 촘촘하게 구성한 유승호식 유희가 이 캔버스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느냐가 이제부터의 관건이다. (*실은 작가와 이 부분에 대해 신통치 않지만 내 아이디어를 전했지만, ‘영업비밀’인 관계로 지면에서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