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회적인 특징 중 하나는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신조어'이다. 신조어가 사회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된다면, 최근 들어 가장 주목 받는 신조어는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2월의 국립국어연구원 발표를 참조하면 2002년에 신조어 408개가 만들어졌다. 신조어가 대부분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 단면들에 대한 지적에서 파생되어온 것에 비해, 그 해에는 "아햏햏"과 같이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인터넷 용어가 대거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매해를 거듭하며 증가하면서 국어파괴라는 시선을 넘어 문화 양상으로 분석되고 있다. "아햏햏"과 같은 문자의 출현은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문화평론가 김동식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시각성만 극대화된 새로운 언어,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로서만 의미 있는 어휘들이 출현하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기표(記標)만 남고 기의(記意)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읽어서는 의미가 이해되지 않고, 눈으로 봐야만 의미가 드러나는 "아햏햏"은 활자보다 영상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는데 익숙한 디지털 영상 세대가 우연히 발명한 '이미지 언어 1호'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 언어는 '키보드'를 사용하여 소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 기법이다. 문자메시지나 인터넷처럼 '자판'이라는 제한적 조건에서 기호를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과 같이 글자 대신 아이콘을 사용하는 이모티콘(Emoticon)이다. 이것은 이모션(emotion)과 아이콘(icon)의 합성어로 함축적인 의미나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을 말한다. 이모티콘의 모양은 언어로 된 활자가 상실하고 있는 대면 접촉시의 표정과 몸짓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호에는 이미 감정이 묻어 있다. 그런가 하면, "아햏햏"처럼 활자를 조합하여 단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형식이 있다. "아햏햏"이나 “뷁”과 같은 것은 누구도 정의 내리지 않았지만 ‘리플달기’와 같은 상호소통 과정 속에서 형성되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떠한 감정상태를 나타낸다. 90년대 PC통신시절부터 인터넷을 즐겨온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이러한 이미지 언어를 만들고 사용하는 주축이자 시발점이라 파악되고 있으며, 기호를 통해 논리보다는 감성의 전달을 우선시하고 의미보다는 즉각적인 느낌을 전달하는데 익숙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햏햏"은 아이들 장난이나 오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햏햏"은 기호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징후이다. 기호와 이미지를 두고 의미를 묻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태도이기 때문이다.
기호를 통해 감성 전달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특징이라는 관점에서 유승호의 시늉말 작업을 바라보고자 한다. 유승호의 작업은 깨알 같은 글자들 수천, 수만, 수억 개가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한걸음 다가서면 글자가 되고 한걸음 물러나면 수묵화가 되는 유승호의 작업은 글자가 집적되어 이미지로 치환되면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세대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승호 역시 “문자들의 놀아남은 무거운 의미들을 가볍게 흘려보내고 화면의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슈~하면서 로케트가 발사되듯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산봉우리들, 버드나무의 이파리가 우수수수 떨어지는 소리. ‘슈슈슈슈...’, ‘우수수수...’등의 글쓰기 작업들은 수없이 반복되는 짧은 의성어, 의태어로 화폭의 수묵화 이미지를 중얼중얼 시늉한다”라고 한다. 유승호는 여기에서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성에 충실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하여 의성어와 의태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함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업 ‘우수수수’는 수 많은 우수수수우수수수우수수수를 집적하여 흩날리는 버드나무 풍경을 그려낸 것이며, ‘슈’는 수 천 만개의 슈로 슈우웅~솟아오른 산의 풍광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유승호의 작업을 단순히 활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의 유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Ctrl+C로 해결할 수 없는 예술가의 존재가 그의 작업 앞에 당당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제도용 0.1mm 펜에 소진되어가는 잉크를 다시 채우며 100호 혹은 그 이상의 화면까지 글자 하나하나로 가득 채우고 있다. 가까이다가가 우수수수를 읊조리다 물러나면 흩날리는 버드나무 풍경이 보이는데, 바람결에 날리는 나뭇잎의 우수수수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유승호의 우수수수는 보이면서 들리는 예민한 감각의 끝에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을 대하면 누구나 헉! 경악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작품 뒤에 숨어있는 작가의 노고를 떠올린다. 그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깨알 같은 우수수수에 흘려보냈는가 하는 의문은 그의 두툼한 안경알을 넘어 도대체 작가란, 작업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포만감”으로 작업을 지속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새로운 태도를 보이는 세대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작품에 대한 작가정신은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모양이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에 의하면, 기성 세대들은 "이것을 만든 사람은 무엇을 의도했던 것일까?" 혹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기호와 이미지의 의미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한다. 반면에 새로운 세대들은 "나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을 통해 '상호 작용적인 관계' 속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겨간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세대들은 기호나 이미지의 의미가 아니라, 기호나 이미지를 통해 생성되었거나 생성될 가능성이 있는 관계들에 더욱 열광한다는 것이다. 유승호 역시 “나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하는 개인적인 의문으로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태어난 시늉말이 눈앞에서 춤을 추고 귓가에서 노래 부르는 희열에 빠져 자신을 잊은 채 시늉말이 되어 감정이입의 작업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작업을 마주대하며 환호하게 되는 것은 유승호와 시늉말이 만나 완벽하게 생성된 기호가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덧붙여 우리는 또다시 그와 그의 시늉말, 그리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이것은 “나”에게 무엇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