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 의미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풍경
고충환 / 미술비평
석남미술상 수상자 홍영인 & 유승호 전
모란갤러리, 2003년 2월 18일~24일
공간 #425 2003년 4월호 개재

이 전시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제정하고 석남미술재단이 주관하는 제22회 석남미술상 수상작가전 형식으로 열렸다. 수상제도의 관건은 제도의 주체에 대한 대외적인 권위가 중요하며, 그 권위는 수상 대상 작가들의 대외적인 활동과 화단에 기여한 행적을 생각해보면, 석남미술상은 수상제도로서의 건전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남미술상이 여러 면에서 실험성이 강한 비교적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화단의 경향을 리드하고,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에는 기존문법에 구속 받지 않는 형식 실험과 탄탄한 자기 논리로 무장한 유승호와 홍영인, 두 작가가 선정되었다.

유승호의 작업은 일종의 문자로 된 그림, 문자드로잉, 콜라그래피의 한 형식으로 범주화할 수 있긴 하지만, 이 가운데 딱히 어느 것이라고 결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의 작업은 콜라그래피라는 범주 속에서 자기 나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는 양가적인 태도와 과정이 읽혀진다. 그러니까 문자와 그림, 의미와 이미지의 경계 위에 있는 그의 작업은 어떤 결정적인 것으로 읽혀지기보다는 현재진행형의 비결정적이고 불안정한 인상을 준다.

이는 작가의 그림이 의미를 공고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의미를 흔들어 의미의 토대(의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를 해체시키려는 전략적인 장치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전략적인 장치가 어떤 거대담론에 힘입은 것이기보다는 놀이와 유희의 유기적 본성과 관련이 깊다. 의미로 축조된 세계를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이를 해체시키고 재편입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문자의 두 성분인 의미론적 속성과 시지각적인 쾌감과의 사이에서 유희하는 것이다. 그 놀이와 더불어 작가는 문자가 갖는 두 성분 중 시지각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는 한편, 어떤 의미를 그것이 결부된 것으로 예상되는 상식적인 맥락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런 탈(재)맥락적인 의미의 사용에 기초한 그의 문자 그림은 일단 재현의 문법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산수화를 비롯한 여타의 암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재현의 상기는 이른바 시지각적 거리(인상파 회화를 지지하는 원리로서 그림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비로소 그림의 형태가 명료해진다는)의 논리를 충족시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림의 표면에 더 가까이 접근해보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어떤 형태가 덧칠된 붓질 속에 해체되는 것과도 같이 이미지는 견고한 재현의 구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대신, 무의미한 문자들이 부유하는 이질적이고 낯선 화면으로 변질된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재현의 견고한 구조가 아니라, 그 재현의 구조가 해체되고 손상되고 변질되는 탈재현을 실천하는 것에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지각적 거리 혹은 심미적 거리를 넘어 화면에 더 가까이 다가와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의미의 조각들과 만날 것을 주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유승호는 이미지와 결부된 재현의 문법(하나의 이미지가 갖는 실제의 상기)을 흔들어 놓을 뿐 아니라, 의미와 결부된 재현의 선입견(하나의 의미가 갖는 실재의 지시)을 흔들어 놓는다. 말하자면 그림시 에서처럼 하나의 시구가 상기시키는 의미론적인 연상과 이를 표상한 이미지와의 최소한의 관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예컨대 전통적인 산수화를 재현하기 위해 동원된 문자의 입자들은 그림시에서처럼 산을 노래하는 시구와도, 그렇다고 산을 의미론적으로 중첩시킨 토플러지와도 거리가 멀다. 대신,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슈’와 ‘야호’의 시늉말이 상기시키는 어떤 울림(일종의 연상작용)으로 인해 마치 산의 입자들(문자의 입자들)이 아래로 흘러내려 해체되거나 공기 속에 산화할 것만 같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렇듯 ‘슈’와 ‘야호’는 그림 속에서 산수화를 재현하고 있긴 하지만, 그 재현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슈’와 ‘야호’의 문자의 입자들이 산수화가 아닌 다른 형태로 재현되어도 무방할 뿐 아니라, 나아가 실재하는 그 어떤 대상도 암시하지 않는 무의미한 형태를 띨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촉발된 의미가, 그리고 이미지와 의미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토대에 기초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홍영인의 커튼은 재현이 은폐하고 있는 의미의 지층들을 함축한다. 예컨대 무겁게 드리워진 장막은 권위를 암시하며, 고전주의 회화 속에 등장하는 커튼은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상징한다. 특히 의도적으로 설치된 사진관 스튜디오 내의 커튼은 그 연출된 풍경에 의해 허위의식의 잔재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 등장하는 커튼은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를 가름하고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로서 기능한다. 이렇듯 커튼은 정치적인 풍경을 재현하는가 하면, 특유의 양가적인 속성으로 인해 탈재현을 실천하는 효과적인 도구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커튼은 욕망을 부추기는 우호적인 기호인 동시에 소외와 거부의 배타적인 기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호기심과 성적 메타포를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심리적 기호이면서, 이와 함께 성적인 권력과 결부된 정치적 기호이기도 하다.

작가는 커튼으로써 이런 (탈)재현적인 기호의 지층들을 드러내는 한편, 일종의 가상적인 공간 개입과 간섭을 실천하기도 한다. 예컨대 커튼을 이용하여 주어진 공간에 가상의 벽면이나 가리개 그리고 기둥을 설치하거나 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원래의 공간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적인 속성을 변질시키고, 공적인 공간(커튼이 설치되기 전의 홀이나 성당 그리고 갤러리 같은)을 사적인 공간으로 전유한다.

이로써 유승호의 작업이 이미지는 보여지는 것인가 혹은 읽혀지는 것인가에 대한 이미지와 의미와의 관계를 묻고 있다면, 홍영인은 작업은 이미지가 그 자체 순수한 것인가 혹은 어떤 이념을 재현한 것인가에 대한 이미지와 정치적인 기호와의 관계를 다룬다. 그럼으로써 이들 두 작가는 의미론적이거나 정치적인 동시대적 재현의 초상을 예시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