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공 풀린 말소리들
인터뷰: 민수홍
art in culture 2006년 2월호 P. 116-119

유승호(1974년생)가 지난 해 말 거둬들인 성과들은 퍽 인상적이다. 하지만 2006년 벽두에 바라본 그의 모습은 다소 우울하고 몽롱했다. 겉보기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그의 작품들을 파헤쳐보기 위해 art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바보 인 척` 하는 작가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 답했다. 그의 글씨 그림들처럼 왱알거리는 그의 이야기들은 커다란 그림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섬약한 남자 괴이한 기운

art 자 진부한 질문으로 시작하죠. 미대는 왜 갔나요?

유승호 그냥 자연스럽게 갔어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게 편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반 활동 같은 걸 꾸준히 하긴 했었는데… 사실, 미대에 간 건 별 뜻 없었어요. 공부는 하기 싫은데 대학 가려니까 미대가 그 중에서 가기 쉬워 보이기도 했고요.

art 예고 나왔어요? 미술학원은 어디 다녔나요?

유승호 아니요.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 나와서 현역으로 대학 갔어요. 고등학교는 충남 대천고 나왔고, 그냥 동네 화실 다니면서 미대 입시 준비했었죠.

art 군대는 언제 갔나요? 그냥 일반 사병이었나요?

유승호 2학년 마치고요. 남원 부근의 35사단이었어요. 그냥 보병으로 다녀왔죠.

art 군대 가기 전의 작업은 어떤 거였나요? 미대 출신으로서 군복무 하면서 그림 그리라는 명령 받은 적 없었어요?

유승호 전 그림을 못 그려서인지 한 번도 그런 명령은 받은 적이 없어요. 군대 가기 전에는 드로잉 같은 페인팅을 했었어요.

art 작업에서 큰 맥락을 이루는 색점찍기와 글자쓰기 중 어떤 걸 먼저 시작했나요?

유승호 글쎄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해서 기억해내기가 영 힘드네요.

art 뇌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길래 그랬을까요. 흥미롭네요. 글씨쓰기는 언제부터 연작으로 그려졌나요?

유승호 199년부터 이듬해까지 작업했던 "슈-"부터였죠. 대학교 다닐 때 만화를 컬러풀 한 유화로 다시 그리는 작업을 했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의성어랑 의태어를 갖고 그림을 그리면 그게 작품이 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만화 "드래곤볼"의 한 장면에서 딴 ‘슈-‘라는 글씨를 갖고 그림을 그렸던 거죠. 처음엔 호기심에서 장난 같이 시작한 거였어요.

art ‘에코워즈(echowards)’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요?

유승호 2000년 서남미술전시관에서의 개인전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사전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건데, ‘시늉말’, ‘흉내말’의 뜻을 가지고 있고… 제 작업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art 학교 다니시면서 그림 배울 때, 기존 회화 기법을 중요시 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승호 씨의 작업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유승호 군대 다녀오고 나서 대학 졸업반 시절, 학교 안에서 친구들이랑 모여서 3인전을 가진 적이 있는데, 다들 ‘묵묵부답’이었어요. 선생님들께서도 암암리에 좋아하시는 눈치였지 별 반응은 없었어요.

art 나름 심심했겠어요. 글씨쓰기가 그리기의 형식으로 굳혀진 건 언제부터였나요?

유승호 1997년부터요. "리히텐슈타인 별자리", "으이그 무서워라" 같은 것들 다 그때 작업했던 애들이에요.

스스로 야금야금 퍼져가는 작업

art 뭘 그린 거죠? 그것도 만화에서 온 것들인가요?

유승호 아뇨. 원래 "으이그 무서워라"는 같은 제목으로 1993년에 얼굴 드로잉으로 처음 작업했던 걸 갖고 글씨 쓰기로 다시 그린 거예요. 처음에 그렸던 얼굴 드로잉이 너무 큰 거 같아서 다시 그렸죠. 그게 대략 전지 사이즈 정도였거든요. 원화에 얼굴이 드러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렸는데 그리다보니 얼굴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도 마음먹고 보려고 하면 보이긴 해요. 1993년에 그린 얼굴 드로잉 "으이그 무서워라" 원작은 굉장히 커요… 보관에 문제가 있죠. 지금 스튜디오 벽면에 롤에 말린 채 걸려있어요.

art 뮤지움에서 그런 거나 사주지. (도록을 들여다보며) 네. 말씀 듣고 보니 정말 보이네요. 이제 얼굴 드로잉 작업은 안하나요?

유승호 네. 1994년에 군대에 있으면서 훈련용 수첩에 얼굴을 그렸었는데요. 그게 얼굴 드로잉의 거의 끝이었어요.

art 왜 얼굴에 관심을 가졌죠?

유승호 그냥 일반적인 거죠. 쉽게 접할 수 있는 거고 다들 다르게 생겨서 그려보면 재밌으니까요.

art "으이그 무서워라"의 저 산맥 밑에 그린 건 뭔가요?

유승호 ‘으이그 무서워라’를 겹쳐 쓴 거에요. 아, "으이그 무서워라"를 그리면서부터 로트링 펜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네임펜도 같이 쓰다가 나중에는 로트링펜만 쓰게 됐죠.

art 와중에 1993년에 작업하신, 점찍기로 된 "동심" 연작은 어린이의 마음을 뜻하는 ‘동심’과 반복되는 ‘동심원’의 ‘동심’을 이중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후일 중요하게 사용되는 형광안료가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유승호 씨의 작업 전개에서 중요성을 지니는 것 같은 데요.

유승호 그렇게 이중적인 의미는 아니었구요. 그냥 순수하게 어린이의 ‘동심’이었어요.

art 작품들이 서로서로 교차되며 연결돼있어서 트릭이 많아 보입니다. 허투루 봤다가는 낭패 보겠는 걸요.

유승호 헷갈리시겠죠, 뭐. 작품 제목도 비슷비슷하고…

art "암산"의 이중적 의미에 관한 아이디어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낸 건가요? `속셈한다`의 암산이기도 하고 `돌산`의 암산이기도 하잖아요?

유승호 1999년부턴데…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어디선가 봤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만나서 그리 된 거 같아요. "어흥"은 의도한 거였어요. 풍경이 형상이 된다는… 이때부터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종종 포착되는 ‘기운’과 ‘형사’의 대립 지점들

art 사실 그렇게, 별도의 이론적 배경에 발 딛지 않은 채 작가의 심상을 구술한다는 지점에서, 유승호 씨의 작업이 각별해지기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옛날 명화를 흠모하듯 재현하는 작업이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유승호 산수화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 "야-호"가 먼저긴한데, 명화를 배껴 그린건 글씨그림인 "슈-"가 제일 처음이었어요. 한그림을 아예 다 베끼는 건 아니에요. 원전을 여기저기서 따오는 식이거든요. 근데 원전에서 소재를 구하려고 화집을 살펴보면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는 게 너무 많아요. 미술사를 잘 몰라서 그런지 원전의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다음엔 안견의 "금강전도"를 베껴보려고 해요. 최근에 자세히 살펴보니 김홍도의 산수화 가운데에도 웃긴 게 되게 많더라구요. 좀 더 공부해야죠.

art 안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원앤제이갤러리 전시에서 선보였던 "몽유도원도"는 몇 점이나 만들었어요?

유승호 1점이요. 에이 그거 돈 좀 더 받았어야 했는데, 사실 별로 팔고 싶지 않았거든요. 우리 나라 옛 그림 중에서는 단연 "몽유도원도"가 최고라는 생각이에요… 진짜 잘그렸더라구에요. 자세히 보면, 야- 디테일이 장난이 아니에요.

art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는 거나 안견, 김홍도 말고 또 훔쳐 그리고 싶은 작가 가 있나요?

유승호 석도(1642-1707 편주: 청나라 초기의 화가. 왕족 출신임에도 출가하여, 승려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다 유민 화가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심오한 화론은 ‘일획’론으로 요약되는데, 오늘의 현대미술에까지 그 영향이 미친다.)라고요. 중국 작가가 있어요. 중국의 산수화가 진짜 화끈해요.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재밌어요. 어유, 그냥, 그림이 배배 꼬인 게 정말 재밌더라구요. 제 관심은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들에 쏠려있어요. 점잖게 그린 것들에 별로 눈이 안 가더라구요.

art 빌렘 드 쿠닝의 여인 시리즈를 활용하는 작업은 계속 진행할 건가요? 드 쿠닝의 회화가 지니는 매력은, 사람의 형상을 부셔가며 추상화하고 그걸 다시 적절한 지점에서 재조직하는 와중에 인간의 시지각이 그걸 사람의 형상으로 읽어낸 데 있죠. 그래서 유승호씨께서 드 쿠닝의 작업을 재활용 한다는 점이 꽤 의미 심장해 보이기도 하구요.

유승호 네… 그래보려고 해요. 근데 그건 안 할려구요. 사실 몽유도원도 판 것도 아까워서 나중에 신몽유도원도를 그려볼까 해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인사동을 지나다 본 건데 어떤 전시에서 누가 제 작업 비슷하게 했더라구요. 저도 다시 해보려구요. 그래서 팜플렛도 하나 얻어왔어요. 누가누가 잘 하나 보게요.

대립시킨 ‘형사’와 ‘기운’에 제 몸을 파먹히다

art 작품에서 쓰이는 색에 관해서 얘기해볼까요? "호랑이"에서는 컬라 로트링펜이 많이 쓰인 거 같은데요. 원전은 고구려벽화인가요?

유승호 그거랑 여기저기서 따왔어요. 처음엔 구름 문향을 어디서 찾을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작업실에 걸려있던 오래된 보자기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그렸죠. 이젠 흑백이 지겨워서 다시 색을 좀 써보게요. 바탕색도 깔고. 근데 최근에 색지에 칼라 로트링펜으로 작업할 땐 하도 눈이 아려서 선글라스를 쓰고 했어요. 색을 잘못 쓰면 눈이 너무 피곤해지거든요. 그러다보면 몸도 따라서 피곤해지고…

art 저런. 그러다가 식욕도 떨어지겠어요. 이참에 조명을 고려해보는 게 어떨까요?

유승호 야, 그거 괜찬네요? 테스를 해봐야겠어요. 근데 진짜, 그래요… 그림 그리고 나면 몸에 진이 쭉 빠지는 게, 어지러워서 아무 것도 못 하겠더라구요.

art 그나저나 김홍주 선생님 작업을 보면 남들보다 더 각별하겠어요.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몸 안에 사리가 생길 것만 같은 작업을 하는데, 평생 몇 점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같은 걸 고민하진 않나요?

유승호 김홍주 선생님 작업을 보면 ‘야 참, 재미없으시겠다’ 싶어요. 저보다 힘드실 거 같더라구요. 몇 점이나 그릴 수 있을까는 생각 안해봤는데… 말씀드렸듯이… 요즘 건강, 특히 눈이 안 좋아져서요… 안 그래도 좀 고민이긴 해요. (웃음)

바보의 길을 추구하는 작가

art 유승호 씨의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논리가 굉장히 역사적이고, 모더니스트들이 고민했던 형식들과 관련이 깊은데 그 위에 일부로 바보스럽고 천치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운 이유는 뭔가요?

유승호 그런 걸 분석하면서 작업하기엔 제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지 않네요. 저는 제 느낌에 많이 의존하는 거 같아요. 바보나 천치처럼 보이려는 건… 제가 생각하기에… 남들 눈에 제가 바보로 보일 것 같아서요.

art 요즘 주의 반응은 어떤가요? 벌써 시기 어린 말들이 들리긴 하던데. ‘김창열 작업같애’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유승호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데… 작업을 분화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해요. 최근에 조수를 두고 작업하게 됐지만 아무래도 좀 조심스럽죠.

art 작년 11월 27일에 있었던 홍콩 크리스티스에서 작품이 고가에 낙찰됐다는 소식은 언제 들었나요? 여기 저기서 축하 말씀도 많이 들었을 거 같은데요.

유승호 네. 일요일 오전 11시쯤인가? 인터넷으로 확인했었는데, 기분이 되게 좋더라구요. 글쎄… 축하한다는 얘기는 거의 못 들었어요. 그때, 이동기 작가께서 전화 한번 주신 거 빼고.

art 다시 진부한 질문이지만,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죠?

유승호 그런 질문을 들으면 참 곤란해요.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음식은 뭐 좋아하냐, 취미가 뭐냐 뭐 이런 질문들이요. 사실, 잘모르겠어요. 진짜 안 좋은 대답이긴한거 같은데, 제가 워낙 무지해서요… 어려서부터도 책 들여다보며 공부하는 것 별로 안 좋아했고. 작가들도 개념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시각적인 매력을 풍기는 작가들이 더 좋더라구요. 진부한 질문에 대한 진부한 대답이겠지만. (수줍게 웃음) 결국 작가한테는, 가만히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글씨그림 시작할 때 어떤 큰 의도를 갖고 시작한 게 아니었거든요.

art 현재 가장 큰 고민이 뭔가요?

유승호 작가에겐 혼자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데, 요즘에 와서 사람들 왕래가 잦아지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혼자 지낼 때가 좋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 몰래 골방이나 동굴을 하나 만들어볼까해요. 비밀작업실 같은 거. 거기는 그림 제작 도와주는 분들도 모르게 하게요. 여기는 이제 공장인 셈이고 정말 예전처럼 저만 홀로 지내는 곳이 다시 필요해진거 같아요. 사실 이번에 개인전 준비하면서, 준비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많이 그렸어요. 정말 많이. 그리면서 제가 가진 생산력에 놀라게 되더라구요.

art 작가가 가끔씩 ‘잠수 타는’것도 이러저러한 관리 차원에서 좋겠죠 무조건 전시 많이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처음에 너무 힘 썻다가 나이 들어서는 영 힘이 빠져 보기 안타까운 작가가 적지 않은 걸 보면, 얼마간 쉬면서 새로운 작업을 고민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유승호 네. 그래도 빨리 미술관에서 전시를 해보고 싶기도 해요. 힘 있는 해외의 큐레이터를 알고 지내고 싶기도 하고. 누구 아는분 없으세요?